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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위기 상황에서 국가 의료 붕괴를 막아낸 숨은 공로자, 개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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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위기 상황에서 국가 의료 붕괴를 막아낸 숨은 공로자, 개원의
  • 경기메디뉴스
  • 승인 2020.04.0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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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대한병원의사협의회 기획‧정책이사
정재현 대한병원의사협의회 기획‧정책이사

오늘(3일) COVID-19로 인해 한 내과 개원의 선생님이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경산에서 내과 의원을 운영하고 계셨던 이 선생님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확진자가 폭증하던 시기에도 휴원을 하지 않고 아픈 환자들을 진료하시다가 감염이 되었고, 아직 환갑이 되지도 않은 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미 중국과 유럽 등에서는 수많은 의료진이 COVID-19에 감염도 되고 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의료진의 사망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였기에 의료진들은 언제든 나도 감염되고 사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이 소식에 의료계는 애도의 물결 속에 슬픔에 빠졌고, 또 한편으로는 의료계의 진심 어린 조언을 외면하여 이런 비극적인 일을 자초한 정부에 대한 분노감도 들끓고 있습니다. 일부 정신 나간 인간들은 이 선생님의 죽음이 COVID-19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정부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사라면 아마 다들 아실 것입니다. COVID-19가 아니었다면 경산에서 개원하고 있던 이 선생님이 지금 시기에 돌아가실 일은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의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명백한 사실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왜곡하고 감추려는 자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파렴치한들입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 때문에 더 화내는 것은 저에게도 아무런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만 이야기하고, 저는 오늘 이 선생님의 안타까운 죽음이 대한민국 의료전달체계와 의료시스템에 던지는 큰 메시지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정부나 일부 어용 보건의료학자들 그리고 의료계 내부에서도 현재의 대한민국 의료전달체계는 정상이 아니므로 반드시 개편해서 선진국처럼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 왔습니다. 일부에서는 주치의제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의원급 의료기관은 만성질환관리의 역할만을 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서 만성질환관리제 시범사업도 현재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개원가가 만성질환 관리만을 하고, 주치의로서 상급의료기관으로의 연결고리 또는 gate keeper 역할만을 하는 서구식 1차 의료가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2014년 통계상 당시 9만 명의 의사 중에서 7만 명 이상이 전문의로 집계되었습니다. 대부분 일반의가 1차 의료를 담당하는 유럽의 상황과 우리나라의 상황은 인적 구성부터가 다른데 이런 상황에서 서구식 1차 의료 모델을 따라가는 것은 심각한 인적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개원의 선생님들 중에는 직접 수술도 하고 입원실도 운영하시는 분도 있고, 어려운 내시경 시술이나 고난이도 검사를 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외국에서 보면 무언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우리나라의 1차 의료가 과연 잘못된 것이고, 서구식 1차 의료 시스템이 옳은 것일까요? 저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이번 COVID-19 사태를 통해서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COVID-19 사태라는 재난적 상황에서 서구식 1차 의료는 곧바로 붕괴되었지만, 우리나라의 1차 의료는 아직도 힘들긴 하지만 건재합니다. 재난적 상황에서 1차 의료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그 충격파는 2차와 3차에까지 미치게 되고, 평소와 다르게 물밀 듯이 들이치는 환자들로 인해서 2, 3차 의료기관도 과포화 상태가 되면 국가 의료체계는 붕괴됩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과 유럽, 미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러한 붕괴 상황이 아직 오지 않았고, 심지어 대다수의 환자가 발생한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의료시스템은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대구·경북 지역 의료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재난적 상황임에도 국민들이 집 근처 의원에서 필요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병원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집 근처 의원들이 다 문을 닫아버렸다면 모든 환자들이 병원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리되면 병원은 과포화가 되면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구·경북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COVID-19 확진자가 언제든 문을 열고 내 진료실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원의들은 마스크 하나에 의지해서 환자 진료를 지속해왔고, 개원의들의 희생으로 1차 의료가 굳건히 버텨준 덕분에 2, 3차 의료기관들이 포화 상태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고 버티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위협받지 않는 국민들은 사재기나 타 지역으로의 탈출 시도 없이 약간의 사회적 거리두기 원칙만을 지키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원의들이 휴원하지 않고 진료를 계속한 이유에는 우리나라만의 혹독한 수가체계와 지불제도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현 상황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국, 사명감뿐만 아니라 탄탄한 실력과 전문성을 갖춘 대한민국의 개원의들이 국가 의료 붕괴를 막아낸 주역이자 숨은 공로자입니다.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1차의료 시스템과 의료전달체계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부와 보건의료 학자들이 알아야 합니다. 이미 의료에 있어서는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음이 드러난 유럽 국가들을 따라 하는 1차의료 개편과 의료전달체계 개편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1차 의료기관의 기능을 단순화시키거나 획일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1차 의료기관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더욱 키워서 지역의 의료서비스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게 하고, 1차와 2, 3차 의료기관이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을 통해서 대한민국만의 독창적인 1차의료 시스템과 의료전달체계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국가 의료 붕괴를 막아낸 영웅 한 명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분은 비록 자신의 진료실에서 아픈 이들을 진료한 일을 했을 뿐이지만, COVID-19라는 보이지 않는 적에게 자신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피하지 않고 한 행동이었기에 진정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을 지금도 대한민국의 2만여 명의 의사들이 매일 해나가고 있습니다. 영웅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현재의 대한민국 의료 정책 흐름을 완전히 바꿔야 하며, 이는 앞으로 의료계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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